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링고 스타 (문단 편집) === 비틀즈 이전 === 링고 스타는 [[1940년]] [[7월 7일]], [[리버풀]]의 전형적인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링고 스타의 어머니 엘시 글리브와 아버지 리처드 스타키는 1936년에 결혼했다. 그들은 리버풀 [[빵가게]]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였다. 링고의 부모님은 결혼한 뒤 아버지의 가족들과 함께 딩글(Dingle)에서 살았다. 딩글은 리버풀에서 스코틀랜드 로드(Scotland Road) 다음으로 거친 곳으로 알려진 도심지로, [[항구]]와도 가까운 곳이다. 이후 그와 밴드를 함께 된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이 살던, 그나마 약간 공기가 좋은 편인 교외지역보다 훨씬 건강에 나쁜 환경이었다. 링고는 당시를 회상하며 "딩글에는 [[공동주택]]이 아주 많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상자 같은 집에 살면서 그곳을 벗어나려고 애썼다. 누군가가 딩글 출신이라고 하면, 다른 곳에 사는 리버풀 사람들은 저 사람은 분명 불량배일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는데도 말이다."라고 말했다. 링고가 태어나기 직전 그의 부모님은 집을 마련했다. 공동 주택은 아니었지만 매드린 스트리트(Madryn Street)에 있는 지저분한 주택가의 테라스 달린 2층집이었다. 1940년 링고의 부모님이 이 집을 살 당시에 집세는 약 14실링 10펜스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링고 스타 어린시절.jpg|width=100%]]}}} || || {{{#fff ''' 어린 시절의 링고 스타 ''' }}} || 링고의 집안은 리버풀의 전형적인 [[노동자]] 집안이다. 링고는 인터뷰에서 "친가 쪽이나 외가 쪽이나 평범한 노동자 계급 가정이었다. 하지만 아마 증조할머니 때는 꽤 잘살았던 것 같다. 증조할머니는 크롬 같은 것으로 울타리를 치기도 했다고 한다. 어쨌든 우리 외할머니는 아주 가난했다. 아이가 열네 명이었다고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링고는 1940년 7월 7일 새벽, 매드린 스트리트 9번지의 집에서 자정을 막 넘긴 시각에 태어났다. 예정일을 일주일 지나서 였는데 집게로 억지로 꺼내 보니 체중이 10파운드(4.5kg)였다고 한다.[* 서양이니 동양인에 비해 평균 체격이 크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신생아가 4kg을 넘는 건 흔치 않다. 상당한 [[우량아]]였던 셈.]태어나서부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고 하다. 링고의 어머니는 이웃들에게 자신의 아들이 마치 이전에 세상에 나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링고의 어머니는 26살, 아버지는 28살이었다. 그들은 첫 아이이자 외동아들이 된 아기의 이름을 [[리처드]]라고 지었다. 첫 아들에게 아버지 이름을 붙이는 것은 당시 노동자 계급의 전통이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도 [[리치]](Richie)라는 애칭으로 불렸는데 링고가 뜨고 나서도 그의 가족들은 링고를 리치라고 불렀다고 한다. 당시 링고가 태어났을 때는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참 진행중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산후조리]]를 하며 침대에 누워서 지내던 중에 전쟁을 알리던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고 하며, 리버풀에 폭격이 시작되었다. 링고가 살던 딩글에는 대피소도 없었고 가족들은 층계 아래 지하 석탄 창고로 뛰어갔다고 한다. 깜짝 놀란 링고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허둥지둥하던 그의 어머니는 그를 거꾸로 든 채 어깨에 둘러매고 창고에 들어갔다고 한다. 들어가서 바로 세워주니 링고는 바로 잠이 들어 공습 내내 잠을 잤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그의 어머니와 이웃들이 좋아하는 이야기 중 하나다. 링고가 막 세 살이 되었을 때 부모님이 이혼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링고는 세 번밖에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존 레논]]의 부모님의 이혼과 달리 링고의 부모님의 이혼은 극적이거나 요란한 일은 없었다. 아이는 어머니가 맡게 되었고, 결국 [[편모가정]]에서 자랄 수 밖에 없었다. 어린시절에는 건강이 안 좋아서, [[맹장염]]이 [[복막염]]으로 전이되는가 하면 [[결핵]]에 걸리기도 했다. 꽤 오래 입원하는 동안 기타를 배웠고 간단한 드럼 연주도 배웠다고 한다. 13세가 될 무렵 어머니 엘지 스타키는 해리 그레이브스라는 런던 출신 남자와 결혼했고, 해리는 링고에게 음악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당시 [[빅 밴드]] 음악을 좋아했던 해리가 어린 링고에게 다양한 음악을 들려준 것이다. 하지만 당시 링고 스타가 살던 딩글 지역은 험한 노동자 동네였기 때문에 범죄도 빈번했고 분위기도 살벌했다고 한다. 링고 스타는 이 시기에 [[테디 보이]] 패션을 하고 다녔는데, 이유는 단 한가지, "얕보였다간 큰일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리버풀의 많은 젊은이들이 생존을 위해 살벌한 복장을 하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링고는 철도 회사에서 일하기도 했고, 여객선의 웨이터로 근무하기도 했다. 다만 여객선 웨이터 일은 오래 가지 못했는데, 배에서 일을 하다가 [[해군]]에 징집될 것이 두려워서였다.[* 당시 [[징병제/영국|영국은 아직 징병제가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배에서 일한 경력이라거나 특정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특정 병과나 군으로 배치될 수 있었다.] 여튼 여러가지 직업을 전전하다가 직장에서 알게된 친구와 함께 스키플 음악에 빠져들게 된다. 해리 그레이브스는 1957년 크리스마스에 링고에게 중고 드럼세트를 선물하게 되고, 이후 링고의 음악 취향은 미국의 [[로큰롤]]로 바뀌게 된다. 이때는 아직 로큰롤이 영국에서 크게 인기를 얻기 전이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https___cdn.cnn.com_cnnnext_dam_assets_200706171921-02-ringo-starr-restricted.jpg|width=100%]]}}} || || {{{#fff ''' 1959년의 링고 스타 ''' }}} || 1959년 그는 '로리 스톰 앤 허리케인스(Rory Storm and Hurricanes)'의 드러머가 되었고 이때 즈음해서 '링고 스타'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1960년경 로리 스톰 앤 더 허리케인스는 리버풀에서 가장 잘나가는 밴드로 성장했고 [[함부르크]] 공연에서 토니 셰리던과 비틀즈를 처음 만나게 된다. 평소 자신들과 마찰이 잦았던 [[피트 베스트]]를 못마땅해하고 있던 비틀즈 멤버들은[* 피트 베스트는 다른 멤버들이 모두 머리를 내릴 때 본인만 올림 머리를 유지했고 특히 조지 해리슨과 마찰이 잦았다고 한다. 실제로 조지가 링고의 밴드 가입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고, 피트가 밴드에서 쫒겨나자 분노한 피트 빠순이들에게 링고 영입의 주범으로 주목되어 계란세례를 받기도 했다. 이런 조지와 링고의 친한 사이는 비틀즈 해체 후까지 이어져 조지가 링고에게 곡을 써주기도 하였다. 공교롭게도 피트 베스트가 빠지고 링고 스타가 영입되면서 비틀즈는 멤버 전원이 [[리버풀]] 출신 그룹이 되었다. (피트 베스트는 [[영국령 인도]] 마드라스에서 태어나 리버풀로 이주한 것이다.)] 나이도 많고 성격도 좋은 링고에게 밴드에 들어올 것을 제안했고 토니 셰리던도 링고에게 더 나은 밴드에서 활동하라고 조언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링고가 비틀즈에 합류하기까지는 꽤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당시 로리 스톰 앤 허리케인스는 그 지역에서 가장 잘나가는 밴드였고, 비틀즈는 로리 스톰 앤 허리케인스보다 한참 낮은 페이를 받는 풋내기들이었다. 게다가 링고 스타는 로리 스톰 앤 허리케인스의 스테이지 수입으로 (비록 악기 운반때문에 장만한 싸구려 자동차이긴 해도) 이미 차를 가지고 있었을 정도로 충분히 먹고 살 수준이었고 존 레논을 제외한 비틀즈의 다른 멤버들에 비해 비교적 나이도 많았다.[* 정확히 말하면 존보다 생일이 빠르기 때문에 최고령이 된다.] 그러나 결국 링고는 비틀즈의 제안을 수락하여 피트 베스트의 자리를 대신해 영입되었다. 그리고 녹음을 하러 와서도 이미 [[조지 마틴]]이 낙점해두고 있던 전문 세션 드러머인 앤디 화이트가 [[Love Me Do]] 세션 당시 링고 대신 드럼을 치는 등 자리를 위협받았다. 정식 합류 이후에도 공연 때 돌까지 맞는 등[* 당시 골수 팬들이 Ringo Never. Pete Best Forever라며 연호하기고 했을 정도.]초기 멤버로 인정받기까지는 험한 길을 걸었지만 비틀즈 역사 마지막까지 함께 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